글

⑫ 위화도 회군, 사대주의가 나라를 세우다

지난 글 「 ⑪ 이성계는 왜 위화도에서 돌아섰나? 」를 나는 이렇게 마쳤다. 땅은 잃었다가도 되찾을 수 있다. 그러나 나라의 시작부터 자주성을 내려놓은 나라는 어떻게 되는가? 이번 글은 그 물음에 대한 나의 답이다. 우리 역사에서 제일 비극적인 사건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고 불렀다. 독립당과 사대당의 싸움에서 사대당이 이기면서 우리 역사가 진취의 기상을 잃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묘청이 진 뒤에도 고려는 자주를 잊지 않았다. 공민왕은 원나라에 빼앗긴 땅을 되찾았고, 우왕과 최영은 명나라 연호를 버리고 요동으로 군대를 보냈다. 꺾인 기상은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그 기상을 다시 꺾은 것이 위화도 회군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꺾인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회군을 이끈 사람이 새 나라를 세웠다. 묘청의 난에서 이긴 사대의 논리가, 이제 한 나라의 뼈대가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위화도 회군과 조선의 건국을 우리 역사에서 제일 비극적인 사건으로 부른다. 나라 이름을 황제에게 물었다 1392년 7월, 이성계는 개경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해 11월, 그는 한상질을 명나라 서울 남경으로 보냈다. 새 나라의 이름을 정해 달라는 글을 함께 보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나라를 차지하고 국호를 세우는 것은 진실로 소신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조선과 화령 등의 칭호로써 천총(天聰)에 주달하오니, 삼가 황제께서 재가해 주심을 바라옵니다. (『태조실록』 태조 1년 11월 29일) 석 달 뒤인 1393년 2월 15일, 답이 왔다. 동이(東夷)의 국호에 다만 조선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이것이 전래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 명칭을 근본하여 본받을 것이며,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 (『태조실록』 태조 2년 2월 15일, 명 예부의 자문) 이성계는 명나라 황제의 궁궐 쪽을 향해 은혜를 사례하는 절을 올렸다. 한상질에게는 밭 50결을 내렸다. 그리고 온 나라에 교...

⑪ 이성계는 왜 위화도에서 돌아섰나?

지난 글 「 ⑩ 철령위는 어디였나? 」에서 나는 명나라의 정사가 남긴 한 줄을 소개했다. 동남쪽에 봉집현이 있으니 곧 옛 철령성이다. 고려와 경계를 맞댄다. (東南有奉集縣 即古鐵嶺城也 接高麗界) (『명사』 권41, 지리지 요동도지휘사사 철령위) 명나라가 1388년 3월 철령위를 세운 곳은 함경남도가 아니었다. 지금의 심양 남쪽, 고려와 경계를 맞댄 요동이었다. 명나라 스스로 그렇게 적었다. 그해 4월, 고려의 군대가 그 요동을 향해 평양을 떠났다.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이끄는 3만 8천여 명이었다. 그리고 한 달 뒤, 그 군대는 압록강의 작은 섬에서 말머리를 돌렸다. 이성계는 왜 돌아섰을까? 그리고 그가 돌아서지 않았다면 요동은 우리 땅이 되었을까? 봉주의 '네 가지 불가' 1388년 4월 1일, 우왕은 봉주에서 최영과 이성계를 불렀다. "내가 요양을 치려 하니 경들은 힘을 다하라." 이성계는 반대했다. 지금 군사를 내는 데에는 네 가지 불가한 것이 있습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이 첫째 불가입니다. 여름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둘째 불가입니다. 나라를 들어 멀리 정벌하면 왜구가 그 빈틈을 탈 것이 셋째 불가입니다. 때가 바야흐로 덥고 비가 오는 철이라 활의 아교가 풀리고 큰 군대가 역병을 앓을 것이 넷째 불가입니다. (以小逆大 一不可 夏月發兵 二不可 擧國遠征 倭乘其虛 三不可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四不可) (『고려사』 권137, 열전50 신우 14년 4월) 네 가지 가운데 둘째부터 넷째까지는 때와 형편의 문제다. 장수라면 당연히 따져야 할 일이다. 그런데 첫째는 다르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불가하다." 이것은 전술이 아니라 나라를 보는 눈이다. 이성계는 그 눈을 맨 앞에 두었다. 흔히 위화도에서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이 '네 가지 불가'는 출병 전 봉주에서 처음 한 말이고, 위화도에서도 같은 이유를 되풀이했다. 이성계는 서경에 머물렀다가...

⑩ 철령위는 어디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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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 「 ⑨ 공민왕은 왜 요동을 쳤나? 」에서 나는 1370년 이성계가 압록강을 건너 요양을 친 이야기를 따라갔다. 그로부터 18년 뒤, 이성계는 다시 압록강에 섰다. 이번에는 건너지 않았다.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렸다. 위화도 회군이었다. 그 회군의 배경에 철령위가 있다. 따라서 위화도 회군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령위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나라 교과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1388년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요동에 붙이겠다고 통보했다. 우왕과 최영은 이에 맞서 요동 정벌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 철령은 함경남도 안변과 강원도 회양 사이에 있는 고개라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철령」 — 이덕일, 『도둑 맞은 한국사』, p.205~206 재인용)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명나라가 함경남도에 철령위를 세우려 했다면 고려 군사는 동쪽으로 가야 했다. 그런데 고려 군사는 북쪽 압록강으로 갔다. 명나라는 철령위를 정말 어디에 세웠을까? 그 전에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명나라는 왜 하필 1388년에 이 문제를 들고 나왔을까? 명나라는 왜 1388년에 철령을 들고 나왔나 원나라는 쫓겨났지만 요동은 남아 있었다 1368년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웠다. 원나라는 몽골 초원으로 물러났다. 이를 북원이라 부른다. 그러나 요동은 바로 명나라 손에 들어가지 않았다. 1371년 『고려사』에 이런 기록이 있다. 북원의 요양성 평장 유익과 왕우승 등이 명나라에 귀부하려 하였다. 그러나 명나라가 백성을 다른 곳으로 옮길까 염려하였다. 요양은 본래 우리 땅이니 우리나라가 청하면 옮기는 것을 면할 수 있을까 하여 사신을 보내 알려 왔다. (北元遼陽省平章劉益王右丞等欲歸附大明 慮遷居民 以遼陽本我地 若我國請命 可免遷徙 遣使來告) (『고려사』 권43, 공민왕 20년 윤3월) 요양의 원나라 관리들이 고려에 도움을 청하며 내세운 까닭은 "요양은 본래 우리(고려) 땅"이라는 것이었다. 「 ⑥ 고려의 서경은 어디였나? 」에서 살펴본 대로 요양은 고려...

⑨ 공민왕은 왜 요동을 쳤나?

지난 글 「 ⑧ 묘청은 왜 반란을 일으켰나? (하편) 」 끝에서 나는 물었다. 작은 나라는 자신들의 연호도 가질 수 없고,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정말 불가한 일인가? 그 물음의 답을 찾으려면 1370년의 압록강으로 가야 한다. 1370년 정월, 동북면의 장수 이성계가 기병 5천과 보병 1만을 이끌고 황초령을 넘었다. 600여 리를 가서 설한령에 이르렀고, 다시 700여 리를 가서 압록강을 건넜다. 그날 저녁 서북쪽 하늘에 자줏빛 기운이 가득했다. 하늘을 살피는 서운관은 "용맹한 장수의 기운"이라고 했다. 공민왕은 기뻐하며 말했다. 내가 이성계를 보냈으니, 필히 그에 대한 응험이다. (『고려사』 권42, 공민왕 19년 정월) 요동을 치러 압록강을 건넌 이 장수가, 18년 뒤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린 바로 그 이성계다. 공민왕은 왜 요동을 쳤을까? 그리고 고려는 그 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원나라 때 빼앗긴 땅 묘청의 난이 끝난 뒤 고려는 무신정변을 겪었다. 이어 몽골이 쳐들어왔다. 40년 가까이 싸운 끝에 고려는 원나라와 강화했다. 그 과정에서 북쪽 땅을 두 번 잃었다. 동북쪽: 1258년 원나라는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두고 그 북쪽을 직접 다스렸다. 서북쪽: 1269년 서경의 최탄 등이 서경과 여러 성을 들어 몽골에 항복했다. 몽골은 그곳에 동녕부를 두었다. (「 ⑥ 고려의 서경은 어디였나? 」) 원나라의 정사 『원사』는 동녕로를 요양행성 아래에 두었다. 동녕부는 요양, 곧 요하 동쪽에 있었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의현, pp.286~288) 땅만 잃은 것이 아니었다. 고려의 임금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해야 했다. 임금의 이름 앞에는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뜻의 '충(忠)' 자가 붙었다. 고려는 자기 연호 대신 원나라의 연호를 썼다. 그 틈에서 원나라에 기대어 권세를 누리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가장 큰 이가 기철이다. 그의 동생은 원나라 순제의 황후, 기황후였다. 공민왕은 뒤에 이렇게 말했다. 기철 등은 임금을 떨...

⑧ 묘청은 왜 반란을 일으켰나? (하편)

1135년 정월, 묘청은 분사시랑 조광, 병부상서 유참 등과 함께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임금을 버린 반란이었나 그런데 이 반란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 서경 쪽은 새 임금을 세우지 않았다. 이덕일은 이것을 인종을 황제로 받들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이덕일의 한국통사』, p.248) 개경에서 사신이 오자 서경의 장수들은 군복 차림으로 뜰에 내려와 절했다. 왕의 안부를 묻고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그리고 편지 한 통을 주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주상께서는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변고가 있을 것입니다." (『고려사』 권127, 묘청전) 이어 서경이 올린 표문은 더 분명하다. 폐하께서는 음양의 지극한 말을 믿고 대화궁을 지으셨으니, 천하의 황제가 머물 도읍을 만드신 것입니다. … 그런데 신하들이 임금의 마음을 본받지 않고 자기 고향 땅만 생각하여 천도를 주저하고 가로막을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 폐하께서 수레를 타고 오신다면 병기를 버리고 싸움을 멈출 것입니다. 서경이 겨눈 것은 왕이 아니었다. 왕을 붙잡고 있는 개경의 신하들이었다. 개경의 신하들은 "신하가 임금을 부르니 그 사자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인종은 사자에게 술과 비단을 내리고 벼슬까지 주어 돌려보냈다. 김부식은 정지상부터 죽였다 김부식은 서경에서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하기 전, 재상들에게 말했다. "서경의 반역은 정지상·김안·백수한이 함께 꾸민 것이다. 이들을 없애지 않으면 서경을 평정할 수 없다." 그리고 세 사람을 궁문 밖으로 끌어내 목을 벤 뒤에 왕에게 알렸다. (『고려사』 권98, 김부식전) 『고려사』는 당시 사람들의 말도 함께 적어 두었다. 김부식은 평소 정지상과 문장으로 이름을 다투었는데, 쌓인 불만 때문에 이때 그를 죽였다는 것이다. (『고려사』 권127, 묘청전) 신채호는 이렇게 썼다. 묘청이 왕명 없이 국호를 고치자 정지상은 왕 곁에서 묘청을 반대했다고 했다. (『조선상고사』 ...

⑦ 묘청은 왜 반란을 일으켰나? (상편)

지난 글 「 ⑥ 고려의 서경은 어디였나? 」에서 나는 고려의 서경이 지금의 요양이었다고 썼다. 이번 글은 그 서경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다. 1135년 정월, 서경의 승려 묘청이 군사를 일으켰다. 서경에 와 있던 개경 관원들을 붙잡아 소금 창고에 가두었다. 개경 사람이라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가두었다. 군사를 보내 개경으로 가는 고갯길을 끊었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했다. 하늘이 열렸다는 뜻이다. 군대는 '하늘이 보낸 충의군',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불렀다. 신채호는 이 사건을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불렀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일을 '묘청의 난'이라는 이름으로만 기억한다. 교과서에는 몇 줄 나올 뿐이다. 나는 이 사건에 대해 세 가지 질문을 갖고 있었다. 묘청은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개경 쪽과 무엇이 어떻게 달랐나? 묘청은 왜 반란까지 일으켜야 했나? 반란이 끝난 뒤 고려는 어떻게 바뀌었나? 이 질문을 가지고 나는 답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부모의 나라에서 신하의 나라로 묘청을 이해하려면 먼저 1126년 봄의 개경을 봐야 한다. 여진은 오랫동안 고려를 섬기던 사람들이었다. 신채호는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에 "여진은 고려를 종이 주인 섬기듯 했다(女眞奴事高麗)"는 말이 있고, 『고려사』에 실린 여진의 국서에도 "여진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여긴다"는 말이 있다고 적었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총론, 번역본 p.71) 그 여진이 1115년 금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고려와의 관계를 두 번 뒤집었다. 첫 번째는 1117년이다. 금나라 임금 아골타가 고려에 글을 보냈다. 형인 대여진 금국 황제가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 우리 조상 때부터 한쪽에 끼어 있으면서 거란을 큰 나라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여겨 조심스럽게 섬겼다. … 왕께서 화친을 허락하여 형제가 되어, 대대로 끝없는 우호를 이루기 바란다. (兄大女眞金國皇帝 致...

⑨ 고인돌은 왜 요하를 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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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 「 ⑧ 고조선의 수도는 어디였는가? (하편) 」에서 나는 고조선 중기 이후의 중심을 요양 일대로 보았다. 요양 남쪽 해성과 개주에는 요동에서 가장 큰 고인돌이 서 있다고 썼다. 그런데 물음이 하나 남았다. 고조선이 처음 일어난 조양 일대, 곧 요서에는 왜 고인돌이 없을까? 이 물음을 나만 던진 것은 아니다. 오래전 한 역사 카페에 올라온 글이 이 점을 짚었다. 그 글은 고인돌이 요하 동쪽에만 있고 요서에는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요동의 고인돌 문화를 고조선과 별개의 문화로 보았다. 이 주제는 가볍게 넘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에 대해 연구한 나의 의견을 밝히려 한다. 고인돌은 요하를 넘지 않았다 사실부터 확인해 보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중국 요령성의 고인돌은 750여 기다. 대부분 요동반도와 발해만 연안에 있다. 북한에서는 대동강과 재령강 일대에 모여 있다. 그리고 서해 연안을 따라 요령에서 전남까지 이어진다. 요하 서쪽, 곧 요서에서 고인돌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찾을 수 없다. 고인돌은 요하를 넘지 않았다. 고인돌 비파형 동검 분포도 나는 「 ② 고대의 국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에서 이 차이를 장례 방식의 차이로 설명했다. 요서 사람들은 돌덧널무덤과 움무덤에 비파형동검을 묻었고, 요동과 한반도 사람들은 고인돌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왜 방식이 달랐는지를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돌로 만든 무덤은 요하 양쪽에 다 있었다 실마리는 요동의 무덤을 다시 보는 데서 나왔다. 요동에는 고인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편 한국사』 4권은 요동에서 가장 이른 청동기 유적인 쌍방유형의 대표 유적을 "석관묘와 지석묘"라고 적었다. 석관묘는 돌널무덤이고, 지석묘는 고인돌이다. 요양의 이도하자에도 돌널무덤이 있다. 요동반도 끝의 강상과 누상에는 돌무지무덤이 있다. 심양 정가와자 6512호 무덤은 땅을 파고 나무로 방을 짠 무덤이다. (『신편 한국사』 4권, 「비파형청동단검문화」) 돌널무덤...

⑧ 고조선의 수도는 어디였는가? (하편) — 고조선 중기 이후의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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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편에서 나는 진개가 고조선 땅 2천여 리를 빼앗은 뒤 고조선이 지금의 평양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럼, 진개의 공격 이후 고조선의 수도는 어디인가? 이 글은 두 갈래로 나누어 살핀다. 먼저 국경을 기록으로 보고, 다음에 수도를 유물로 본다. 국경은 중국 사서가 자세히 적었다. 그러나 고조선의 중심을 적은 같은 시대의 기록은 없다. 그래서 수도는 땅에 남은 흔적으로 찾을 수밖에 없다. 고조선 말기의 서쪽 국경 『위략』은 한나라 초 "조선과 연은 패수를 경계로 삼았다"고 적었다. 위만도 이 패수를 "동쪽으로" 건너 조선에 들어왔다. 패수는 고조선 말기의 서쪽 국경이었다. 여기서 시기를 분명히 해 둔다. 나는 「 ⑤ 갑골문에 나오는 방은 어느 나라인가? 」에서 상나라 때 고조선은 베이징과 하북 일대에서 상나라와 맞섰고, 난하와 갈석산이 경계가 된 것은 진시황의 통일 뒤라고 썼다. 『위략』의 이 기록은 그보다 뒤, 한나라 초의 일이다. 그러니 이 글에서 말하는 패수는 고조선 말기의 국경이다. 패수가 어느 강인지에 대해서는 대동강설, 대릉하설, 난하설 등 여러 설이 있다. 그러나 나는 「 ⑦ 고대의 요수는 어디였나? (상) 」에서 고대의 요수가 지금의 난하였다고 이미 썼다. 요수는 '먼 강', 곧 국경을 이루는 강의 이름이었다. 패수도 마찬가지로 국경의 강이었다. 나는 고대의 요수와 패수가 모두 난하 일대를 가리킨다고 본다. 난하의 서쪽에는 또 하나의 강이 있다. 북경 동북쪽 밀운에서 고북구로 이어지는 조하(潮河)다. 『환단고기』 역주본은 패수를 "지금의 조하"라고 풀었다. 그런데 이 조하의 옛 이름이 흥미롭다. 송나라 때 편찬된 『무경총요』는 연경(지금의 북경)에서 북쪽으로 가는 길을 이렇게 적었다. "단주에서 … 산으로 들어가면 길이 구불구불하여 다시는 이정표가 없다. 조선하를 건너 90리를 가면 고북하구에 이른다." 밀운에서 고북구...

⑦ 고조선의 수도는 어디였는가? (상편) — 진개는 고조선을 평양으로 밀어냈는가

나는 학창 시절에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어디인지를 물었다. 그러나 고조선의 수도가 어디인지는 묻지 않았다. 질문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만큼 고조선은 나에게 역사가 아니라 신화였다. 지금은 다르다. 나는 지난 글들에서 이 땅의 고인돌과 청동검을 살펴보았고, 단군의 기록과 요서의 유물을 맞추어 보았다. 갑골문 속의 방(方)과 제(帝)도 찾아보았다. 나는 이제 고조선이 신화가 아니라 역사라고 확신한다. 역사라면 수도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고조선의 수도는 어디였는가? 한 편의 방송에서 시작된 질문 이 질문이 시작된 것은 우연히 본 방송 한 편 때문이다. KBS 「HD역사스페셜 – 첫 나라 고조선, 수도는 어디였나」(2005년 5월 27일 방송)다. 유튜브에서 130만 명 넘게 본 영상이다. 👉  KBS HD역사스페셜 「첫 나라 고조선, 수도는 어디였나」 방송의 줄거리는 이렇다. 고조선을 대표하는 유물인 비파형동검은 현재 북한의 평양보다 요서와 요동, 만주에서 더 많이 나온다. 가장 크고 정교한 탁자식 고인돌도 평양이 아니라 요동반도의 개주와 해성 일대에 있다. 중국 사서의 주석은 요동의 험독현이 조선 왕의 옛 도읍이라고 적었다. 방송은 이 험독을 요하 하구, 지금의 개주·해성 일대로 보았다. 여기까지는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고조선의 첫 수도는 아사달이라고 많은 한국인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 아사달이 지금의 어디인지를 두고는 하얼빈설, 요동설, 평양설 등 여러 설이 있다. 나는 「 ③ 배달국과 단군을 다시 읽다 (상) 」과 「 ④ 배달국과 단군을 다시 읽다 (하) 」에서 단군의 첫 도읍을 요서의 조양 일대로 보았다. 그리고 고조선 중기 이후의 중심은 요양 일대였다고 썼다. 방송이 말한 개주·해성 일대도 요양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이 글은 그 뒤의 이야기다. 지금 내가 주목한 것은 방송의 그 다음 대목이다. 방송이 말하는 '평양 천도' 방송은 이렇게 이어진다. 고조선은 요동에 수도를 두고 요서까지 아...

⑥ 갑골문 속의 제(帝)는 누구인가

「 ③ 배달국과 단군을 다시 읽다 (상) 」에서 나는 물음 하나를 남겨 두었다. 『삼국유사』의 환웅은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렸다. 바람과 비와 구름이다. 그런데 상나라의 갑골문에도 바람과 비와 우레를 부리는 존재가 나온다. 제(帝)다. 「 ⑤ 갑골문에 나오는 방은 어느 나라인가? 」에서는 상나라와 끝까지 싸운 동북쪽의 나라 방을 살펴보았다. 나는 방이 고조선일 수밖에 없다고 썼다. 그렇다면 갑골문 속의 제(帝)는 누구인가. 상나라의 신인가?, 상나라의 조상인가?, 아니면 우리 기록 속의 누군인가? 이 글도 최명희 박사의 갑골문 강의를 바탕으로 쓴다. 원문 뒤의 번호는 갑골문을 모아 놓은 『갑골문합집(甲骨文合集)』의 번호다. 비와 우레와 바람에 명령하는 제(帝) 갑골문에서 제(帝)는 자연에 명령을 내리는 존재다. 몇 줄만 읽어 보자. 갑골 원문 풀이 번호 今一月帝令雨 이번 1월에 제(帝)께서 비를 내리도록 명령하실까요? 합집 14295 帝其及今十三月令雷 제(帝)께서 이번 13월에 이르러 우레를 명하실까요? 합집 14127 翌癸卯帝其令風 다음 계묘일에 제(帝)께서 바람을 명하실까요? 합집 672 제(帝)의 힘은 자연에서 그치지 않는다. 제(帝)는 비를 내려 한 해의 농사를 좌우했다(帝令雨足年, 합집 10139). 왕이 성을 쌓을 때는 제(帝)가 도울지를 물었다(王乍邑 帝若, 합집 14201). 다른 나라를 칠 때도 제(帝)가 도울지를 물었다(합집 6270). 농사와 성과 전쟁이 모두 제(帝)의 뜻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상나라 왕은 일 년 내내 조상과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이렇게 큰 힘을 가진 제(帝)에게는 제사를 올린 기록이 없다. 상나라 왕은 제(帝)에게 직접 빌지 못했다. 조상의 신이나 제(帝)의 사자를 통해서만 빌 수 있었다. 이것은 최명희 박사만의 말이 아니다. 갑골문을 연구한 학자들이 널리 인정하는 사실이다.  최명희 박사는 두 가지를 더 짚는다. 하나는 제(帝)가 무정 때의 갑골문에 가장...